내 집 마련은 아직 먼 이야기?
나이 51,
일터에서는 “차장님” 집에서는 “OO 아빠”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해진다. 점심시간에 부동산 이야기라도 나오면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문다. 대출, 전세, 분양, 갭투자… 다 아는 단어인데, 막상 내 삶에는 너무 낯선 단어들이다.
왜일까.
나는 국민임대주택에 살고 있다. 그리고 올해로 17년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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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 잠깐 살다 나올 줄 알았지”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말 그대로 임시였다.
아내와 함께 “애들만 좀 키우고, 형편 좀 나아지면 바로 옮기자”는 이야기를 했다.
그땐 나도 지금보다 훨씬 젊었고, 야근이 버겁지 않았고, ‘기회’라는 단어에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우선순위는 언제나 ‘내 집’보다 ‘지금 아이들이 더 급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을 번번이 되돌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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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말이 없다
나는 자주 참는다.
힘들다는 말, 속상하다는 말, 억울하다는 말.
아빠라는 역할은 그렇게 조용히 감정을 숨기며 만들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직장동료들이 알뜰살뜰 모아서 내 집을 구매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인다. 나는 왜 안 되는 걸까?
가끔 20년 가까이 전업주부로 아이들을 챙기며 가정을 꾸려온 아내한테도 미안해진다. 스스로 애써 괜찮다고 말하면서, 혼자 잠 못 드는 밤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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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앱, 그냥 보는 거지 뭐
나는 요즘 부동산 앱을 본다.
우리 동네 매물 보기도 하고, 우리 집과 비슷한 구조의 전세 시세도 찾아본다.
찜해둔 아파트 몇 군데 있다.
아이들 학교랑 가깝고, 역세권이고, 가격도 처음엔 괜찮아 보였던 집들.
하지만 몇 년 사이 가격은 두 배, 세 배가 됐고,
내 월급은 여전히 10년 전과 큰 차이가 없다.
“지금이라도 들어가야 해.”
누군가는 그렇게 말하지만, 나는 감히 그렇게 못한다.
내가 가진 돈으로는 진입조차 어려운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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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이 집이 고맙다
남들이 보기엔 오래된 임대아파트일지 몰라도,
이 집에서 우리 가족은 매일 밥을 먹었고, 아이들은 웃었고, 나는 버텼다.
좁은 주방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반찬을 만들었고, 빵과 쿠키를 굽기도 했다. 아이들 방에 들어갈 침대와 책상도 아이들이 커갈 때마다 낡아지면 바꿔주었고 어느새 둘 다 대학생이 되었다.
퇴근하고 현관문 열면
아이들 “아빠 다녀오셨어요!” 하는 목소리에 하루 피로가 녹았다.
때론 이 집이 갑갑하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보면 오히려 이 집이 우리 가족의 버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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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집이 없는 게 아니고, 나만 애들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게 딱 하나 있다면,
우리 아이들이 크면서 한 번도 큰 병치레 없이, 밝게 자라줬다는 거다.
그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값진 거라는 걸,
조금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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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꼭
언젠가는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도 물가 오르고, 금리 오르고, 희망은 자꾸 뒷걸음친다.
그래도 나는 오늘도 일터로 나간다.
조금이라도 아이들에게 더 나은 하루를 주고 싶어서.
그리고, 내가 지키고 싶은 이 가족을 위해서.
내 이름으로 된 집 한 칸 없다고 해서,
내가 가족을 지키지 못하는 건 아니라는 걸
나는 안다.
그리고, 오늘도 그 믿음 하나로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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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갓 스무살이던 1993년 여름에 필리핀을 다녀온 적이 있다. 입대하기 전인 관계로 대한민국 남자가 받을 수 있는 여권은 한 번 쓰고 버리는 단수여권만 발급이 가능했다. 그것도 재산세 3만 원 이상 납부하는 사람으로 보증인을 3명 이상 세워야 발급이 가능했다.
그때당시 우리집은 200만 원 보증금에 5만 원 월세를 내는 LH 영구임대주택이었다. 그런 환경이면 필리핀을 갈게 아니라 방학 때 열심히 알바를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세상모르는 스무 살 철부지였다.
아무튼 아버지 지인들중에는 자가로 재산세를 내며 사는 분들이 없었다. 필리핀 2주간의 여행보다 여권을 만들기 위해 외국에 갔다가 도망가지 않고 군입대를 위해 잘 돌아올 사람이라고 보증해 줄 3명을 찾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는것은 내가 직접 나를 아는 지인들의 집을 찾아가서 만나고 컨택(?)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집을 소유하고 재산세를 납부하시던 분들이 대단해 보였다.
그때는 어렴풋이 나의 명의로 된 내집을 가졌으면 하는 소망이 생겼던 것 같다.
95년 가을, 군대를 제대하고 여러번 출국할 기회가 찾아왔다. 이제 신분이 예비군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여권도 5년짜리 복수여권 발급이 가능해졌고 공항에 있는 병무청 사무실에 신고서만 제출하면 바로 출국이 가능했다.
그렇게 주변에 재산세 내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던 스무 살 청년은 31년이 지나 대학생 2명과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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